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치킨을 먹었을까요?

김사부2 2024-10-14 오후 12:45:07

한국인에게 치킨은 단순한 먹을거리가 아닙니다. 치킨은 한국 문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으며, 사람들의 감정과 연결된 음식입니다. 2016년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SNS에서 치킨이 많이 언급될수록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언급도 함께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는 치킨이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음식이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한국인은 기분이 좋을 때 치킨을 먹고, 반대로 치킨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인은 치킨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치킨의 매력은 그 맛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힘에 있습니다 프라이드 치킨의 역사는 13세기 지중해 일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서유럽은 로마 가톨릭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었으며, 예수의 죽음 전 40일간을 일컫는 사순절을 가톨릭 교회는 속죄와 참회의 날로 지정했습니다. 이 기간에는 고기를 먹는 것이 금지되었고,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금기가 이어질수록 고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금기를 어기지 않으면서도 고기와 비슷한 만족감을 느낄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고, 그 결과 찾아낸 것이 바로 튀김 요리였습니다. 금육 기간에도 먹을 수 있었던 야채나 생선에 밀가루를 뿌리거나 반죽을 입혀 튀겨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의 야채튀김인 ‘페이시뉴 다 오르타’와 스페인의 생선튀김인 ‘페스카도 프리토’ 같은 음식들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페스카도 프리토는 15세기에 영국으로 전해져 ‘피시 앤 칩스’라는 유명한 요리로 발전했습니다. 튀김은 바삭바삭한 식감과 고소한 풍미 덕분에 중세 유럽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이는 치킨의 조리법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렇다면, 닭고기를 튀길 생각, 즉 프라이드 치킨을 만들 생각을 처음 떠올린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15세기에는 프랑스인들이 치킨의 먼 조상이 되는 음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프리카세'라는 음식이 바로 그것인데요, 닭고기를 살짝 튀긴 뒤 화이트 소스를 붓고 끓이는 방식이었으므로 사실 튀김보다는 스튜에 가까운 음식이었습니다. 이 프리카세는 영국으로 전해졌고, 특히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18세기 스코틀랜드인들이 먹었던 프리카세는 닭고기를 조각낸 뒤 계란물과 빵가루를 묻혀 갈색이 나도록 튀긴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음식도 우리가 아는 프라이드 치킨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치킨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형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습니다. [2. 소울 푸드]치킨은 이제 한국에서 단순한 음식의 범주를 넘어, 사람들의 삶과 문화 속에서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치킨을 가족, 친구와 함께 나누며 소중한 순간을 공유하는 음식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기념일, 생일, 혹은 특별한 날에 치킨을 주문하는 것은 더 이상 흔한 일이 아닙니다. 치킨은 사람들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되었고, 서로의 사랑과 우정을 확인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또한, 한국의 다양한 치킨 프랜차이즈들은 각기 다른 맛과 스타일을 자랑하며,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매운 양념, 간장, 허니버터 등 다양한 소스와 조리법이 존재하여, 누구나 자신의 취향에 맞는 치킨을 찾을 수 있습니다 18세기,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그중 많은 이들은 버지니아, 캐롤라이나 같은 남부에 정착했습니다. 바로 이곳, 미국 남부에서 치킨은 우리가 아는 치킨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에는 미국 남부의 면화농장에서 일했던 흑인 노예들이 이 변화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영국 자본이 흘러들면서 남부의 면화 산업이 급성장하고 있었고, 덕분에 1820년에는 미국이 인도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면화 생산국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흑인 노예들은 면화 산업의 핵심 노동력이었습니다. 이들이 원래 살던 곳은 서아프리카로, 이 지역은 무더운 기후가 이어지는 땅이었습니다. 따라서 음식이 쉽게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강한 향신료를 사용하는 문화가 발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살던 흑인들이 아메리카로 끌려오면서 아프리카의 향신료 문화는 유럽의 튀김 문화와 만나게 됩니다. 재산을 가질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던 흑인 노예들에게 닭은 기르는 것이 허용된 유일한 동물이었죠. 그래서 이들은 크리스마스와 같은 특별한 날이면 기르던 닭을 잡아 프라이드 치킨을 요리해 먹곤 했습니다. 닭고기를 조각낸 뒤 갖가지 향신료와 소금에 버무리고, 스코틀랜드의 방식대로 튀김옷을 입혀 튀겼습니다. 그 결과 강한 향미가 배어나오는 미국 스타일의 독특한 프라이드 치킨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고통스러웠던 노예 시절, 프라이드 치킨은 흑인들에게 위안을 주었던 몇 안 되는 음식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프라이드 치킨을 ‘흑인의 소울푸드’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미국의 특색 있는 프라이드 치킨을 세계적인 음식으로 발돋움시킨 것은 바로 KFC입니다. KFC는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의 약자이지만, 1952년에 KFC가 처음 문을 연 곳은 의외로 켄터키 주가 아니라 유타 주였습니다. 켄터키라는 이름은 창립자인 커널 샌더스가 켄터키 주에 살 때 만든 치킨 스타일을 계승한다는 의미입니다. 샌더스는 11가지의 향신료를 배합해 자신만의 비밀 양념을 개발했고, 이를 통해 개성 있는 풍미를 가진 프라이드 치킨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비밀 양념은 KFC가 미국 사회에서 인기를 끈 가장 큰 비결이 되었습니다. KFC는 빠르게 성장하며 전 세계적으로 프라이드 치킨 문화를 확산시켰습니다. 한국에서도 KFC의 영향력은 막대했으며, 이후 한국의 치킨 프랜차이즈들이 생겨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은 KFC의 프라이드 치킨을 통해 새로운 맛의 경험을 하게 되었고, 이는 한국 치킨 문화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리얼힙 특히, 한국의 치킨은 다양한 소스와 조리법으로 변형되어 새로운 맛을 창출하며, 한국의 외식 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한국에서 치킨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치킨을 먹는 순간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가족과 친구와의 소중한 시간을 공유하는 특별한 순간으로 여겨집니다 비결 중 하나는 샌더스가 개발한 압력튀김기였습니다. 압력이 높아지면 액체는 더 높은 온도에서 끓게 되는데, 이 때문에 압력튀김기에서 닭고기를 튀기면 더욱 고온에서 조리되어 식감이 부드럽고 촉촉해집니다. 압력튀김기의 원리는 단순하지만, 그 효과는 매우 놀랍습니다. 처음에는 고온에서 요리하면서도 수분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는데, 이를 통해 KFC는 기름지지 않으면서도 바삭한 프라이드 치킨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비밀 양념과 압력 튀김기라는 두 가지 무기를 든 KFC는 미국과 전 세계 시장을 공략해 나갔고, 전 세계인들에게 프라이드 치킨의 매력을 각인시켰습니다. 이러한 혁신적인 조리법은 KFC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패스트푸드 체인으로 자리 잡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1970년대 초, 한국에는 닭 한 마리를 통째로 튀긴 ‘통닭’이라는 음식이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이 통닭은 닭고기를 조각내지도 않았고, 향신료를 배합해 밑간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국식 프라이드 치킨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통닭은 조리법에서부터 미국식 프라이드 치킨과 차별화된 특징을 보였으며, 그 자체로 간단하면서도 특별한 의미를 가진 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흑인들에게 프라이드 치킨이 귀한 날에만 먹는 음식이었던 것처럼, 1970년대 한국인들에게도 통닭은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아버지의 월급날이나 생일,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이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통닭을 뜯으며 그 날을 기념했죠. 이러한 상황에서 통닭은 단순한 음식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가족과 함께하는 소중한 순간들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축제의 음식이었습니다. 프라이드 치킨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 80년대 초의 일이었습니다. 1977년 림스치킨을 시작으로 페리카나, 처갓집 같은 치킨 프랜차이즈들이 등장했고, 마침내 1984년 KFC가 한국에 진출하며 정점을 찍게 됩니다. KFC의 한국 진출은 한국에서 치킨 시장의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맛과 경험을 제공했습니다. 이로 인해 치킨은 통닭을 밀어내고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닭 요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한국인들이 치킨과 사랑에 빠졌던 것은 아닙니다. 프라이드 치킨은 매우 기름진 음식으로, 느끼함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기름진 맛은 일부 소비자들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했으며, 이로 인해 치킨에 대한 선호도가 갈리게 되었습니다. 이 단점을 적절히 보완한 것이 바로 1980년대 말에 등장한 양념치킨입니다. 대전의 페리카나와 대구의 맥시칸은 고추장, 간장, 마늘, 물엿 등을 섞어 매콤달콤한 소스를 만들었고, 이 소스는 치킨의 느끼함을 잡아줘 한국인들이 부담 없이 치킨을 즐길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새로운 조합은 치킨의 맛을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었고, 소비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습니다. 또한, 맥시칸에서 만든 치킨 무 역시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치킨 무는 양념치킨과 함께 제공되며 느끼함을 상쇄해주는 역할을 했고, 이는 한국인들이 치킨을 더 즐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양념치킨과 치킨 무의 등장은 기존의 프라이드 치킨을 싫어했던 소비자들까지 끌어들였고, 이로 인해 치킨은 국민 간식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치킨이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음식으로 자리 잡는 결정적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추장, 간장, 마늘과 같은 전통적인 한국 재료들로 만들어진 독특한 양념이 바로 한국 스타일 프라이드 치킨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조합은 한국의 맛을 잘 살리면서도 미국인들에게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경험을 제공합니다. 이로 인해 양념치킨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되었으며, 그 인기는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KFC의 약자가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이 아닌 '코리안 프라이드 치킨'이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한국 프라이드 치킨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한국인이 프라이드 치킨의 느끼함을 소스나 치킨 무로만 해결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청량감을 주는 탄산음료, 특히 콜라와 맥주는 치킨과의 조화로운 궁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1982년 프로야구의 출범 이후,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 등 여러 스포츠 축제가 열리면서 치킨과 맥주는 한국식 축제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특히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한국 대표팀의 4강 진출이라는 기적적인 순간에 많은 사람들이 치킨과 맥주를 함께하며 그 순간을 기념했습니다. 그 여름의 뜨거운 환호는 치킨과 맥주에 스며들어,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2002년 이후 치킨집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며, '치맥'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습니다. 치킨은 이제 자타공인 한국의 축제 음식으로 자리 잡았으며, 그 의미는 단순한 식사를 넘어서는 깊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치킨을 먹을 때, 단순한 고기를 넘어서 '행복'이라는 개념을 함께 소비하는 것입니다. 즐거운 자리에서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치킨을 먹기도 하고, 일상에서 무료함을 느낄 때 치킨을 통해 작은 축제를 만들고자 합니다. 한국인에게 치킨은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이며, 삶의 다양한 순간을 함께 나누는 매개체로 자리 잡았습니다. 치킨은 가족과 친구들 간의 유대감을 더욱 강화시키고, 특별한 순간들을 기념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한국에서 치킨을 먹는 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서로의 행복을 나누고 기쁨을 축하하는 행위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이유로 치킨은 한국 사회에서 필수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랑받는 음식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결국, 한국인과 치킨의 관계는 단순한 소비를 넘어서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치킨은 한국인의 일상 속에서 자주 등장하며, 각종 축제와 기념일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한국인은 이렇게 치킨과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무서운 미이라는 언제 생겼을까요?

올인원99 (2024-03-22 오후 12:37:33)

영어로 'mummy'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미라 제작 과정에서 역청을 사용하기 때문에, 아랍어로 역청을 뜻하는 'mum'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미라'라고 부르는데, 사실 정확한 표현은 '미라'입니다. 상태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 중 하나는 내장을 제거하고, 시체를 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내장을 제거한 후, 시체를 염화나트륨으로 채워 건조시키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후, 보존을 위해 역청과 같은 물질을 바르고, 린넨으로 감싸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러한 복잡한 과정을 통해, 미라는 수천 년 동안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역청은 미라 제작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역청은 방부제 역할을 하여 시체가 부패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는 아랍어로 'mum'이라고 불리며, 이 단어에서 'mummy'라는 영어 단어가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미라 제작에 사용된 재료와 방법은 그 지역의 자연 환경과 문화에 따라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사막과 같이 건조한 지역에서는 자연적인 조건이 미라가 잘 보존되도록 도왔습니다. 미라의 발견은 고대 문화와 종교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미라를 통해 고대 사람들의 생활 방식, 신앙, 사회 구조 등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라와 함께 발견된 유물, 무덤의 구조, 미라 제작에 사용된 재료 등은 당시의 기술 수준과 종교적 신념을 반영합니다. 또한, 미라 연구는 고대 질병, 영양 상태, 심지어 고대 인류의 유전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줍니다. 전 세계 다양한 문화에서 발견된 미라는 고대 문화의 다양성을 보여줍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된 미라는 주로 종교적 의식의 일환으로 만들어졌으며, 아시아에서는 불교 신자들이 중요한 스승의 유해를 미라로 보존했습니다. 이렇게 미라는 단순히 죽음과 관련된 유물이 아니라, 고대 사람들의 삶과 문화, 신앙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입니다 미라 제작 과정은 단순히 시체를 보존하는 기술적인 작업을 넘어서,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있어서는 종교적이고 의식적인 행위였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사후 세계는 현실의 연장이자 새로운 시작으로 여겨졌으며, 이러한 믿음은 사후 세계에서의 존재를 위한 철저한 준비를 필요로 했습니다. 미라 제작은 이러한 준비 과정의 핵심이었고, 죽은 이가 사후 세계로의 여정에서 필요한 신체적 형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다양한 의식적 절차와 마법적 주문들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미라의 입에 "입을 열어주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죽은 이가 사후 세계에서 말하고, 숨 쉬며,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미라 제작 과정은 고대 이집트의 기술력과 종교적 신념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입니다. 시체의 장기를 제거하고 나트륨과 같은 염분으로 처리하여 수분을 제거하는 과정은 과학적 지식에 기반을 둔 것이었습니다. 이는 부패를 방지하고 시신이 오랜 시간 동안 보존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더불어, 각종 향료와 방부 처리 약품의 사용은 미라가 쾌적한 상태로 유지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며, 이는 사후 세계에서도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고대 이집트인들의 노력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모든 이들이 동일한 수준의 미라화 과정을 거치지는 않았습니다. 사회적 지위와 부의 정도에 따라 미라 제작의 질과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귀족이나 왕가의 구성원들은 매우 정교하고 고가의 재료를 사용하여 미라를 제작했지만, 평민들은 더 간소화된 방법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고대 이집트 사회 내에서의 계급 차이가 죽음 이후의 준비와 관련된 관행에도 반영되었음을 드러냅니다. 미라 제작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주로 고대 이집트의 무덤, 벽화, 파피루스 문서 등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기술과 신념이 어떻게 현실과 결합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미라 제작의 역사와 그에 따른 의학적, 사회적 영향은 매우 광범위하고 복잡합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된 미라 제작은 단순히 사후 세계를 위한 준비 과정을 넘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한 문화와 시대를 거치며 여러 방면으로 발전하고 변화하였습니다. 기원전 3000년경부터 시작된 미라 제작은 기원후 3세기까지 지속되다가, 이집트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점차 감소하게 됩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미라는 과거의 유물로 여겨지기 시작하며, 그 희소성으로 인해 가치가 증가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미라에 대한 인식과 그 활용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시작된 미라의 반출은 초기에는 그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중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미라에 대한 순환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아랍의 문명과 의학을 접한 유럽인들은 중동의 의학을 맹신하게 되었고, 이는 유럽 내에서 미라와 같은 중동의 의학적 요소에 대한 수요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중세 유럽에서는 미라를 가루로 만들어 '몰락'이라고 불리는 약품에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미라 제작 과정에서 사용된 방부 처리 약품인 몰락이 시간이 지나도 그 성분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미라는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지며, 다양한 질병의 치료에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념과 관행은 당시의 의학적 지식과 신념이 어떻게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일 뿐, 현대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는 매우 비과학적이며 위험한 행위였습니다. 실제로, 미라를 이용한 치료법은 실제로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때로는 건강을 해칠 수도 있었습니다. 미라 제작과 그에 따른 다양한 관행들은 고대 이집트의 사후 세계에 대한 신념에서 시작되어, 시간과 공간을 넘어 다양한 문화와 역사 속에서 발전하고 변화하였습니다 이집트의 미라가 전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고, 특히 언데드라는 이미지로 변모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역사적 사건과 문화적 상상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서양인들이 이집트 문명과 미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첫 계기였습니다. 이 원정은 과학적 발견과 함께 다수의 유물을 유럽으로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고, 이집트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의 탄생을 촉진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 확장과 함께 유럽인들에 의한 이집트 유물의 대대적인 수탈이 이루어졌고, 이는 유럽 내에서 이집트에 대한 관심을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특히 1922년에 발견된 투탕카멘의 무덤은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무덤에서 발견된 황금 가면과 다양한 보물들은 이집트 문명의 신비로움과 화려함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러나 투탕카멘의 무덤을 조사하던 일부 인물들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투탕카멘의 저주'라는 미신이 생겨났고, 사정지연이는 대중 매체를 통해 확산되어 미라에 대한 공포와 호기심을 증폭시켰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미라를 단순한 고대 유물이 아닌, 신비롭고도 무시무시한 존재로 만들어 대중 문화 속에서 언데드로 재탄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서 미라는 언데드로서의 이미지를 강화하며, 공포와 모험의 주요 소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미라가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작품들에서 이색적인 소재로 인기를 끄는 것은 오리엔탈리즘과 관련이 깊습니다. 서양에서 바라본 동방의 신비로운 이미지는 이집트와 미라를 포함해 다양한 동방 문화의 요소들을 판타지와 공포 장르에서 독특한 배경과 소재로 활용하게 만들었습니다. 러한 작품들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표현은 이집트 미라를 전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단순한 역사적 유물을 넘어서는 상징적인 이미지로 자리매김 합니다

전술의 신으로 불리우는 중국의 악비 장군

수탠바이 (2024-02-02 오후 2:40:44)

악비는 그의 뛰어난 전략적 사고와 눈부신 용감함으로 인해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국에 걸쳐 멀리멀리 퍼져나가며 그의 대단한 업적이 널리 알려져,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특히 그는 강력한 금나라에 대항하여 여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 내었고, 이로써 그의 용감한 행동과 능력은 전국적으로 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의 군대는 그의 뛰어난 리더십 아래 항상 승리를 가져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의 이름은 일반 백성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부신 성공은 부러워하는 사람들을 만들었고, 그들은 그를 배신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는 간신들의 모함에 불시에 부딪혔고, 그의 생명을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싸웠습니다. 그의 눈먼 용기와 흔들림 없는 결단력은 그를 더욱 강하게 했습니다. 그의 뛰어난 능력과 용감함은 그를 중국 역사의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그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그의 이름은 그의 뛰어난 능력과 용감함을 기리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제 그의 용감함과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그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능력과 용감함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으며, 그의 이야기는 그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 용감한 전사의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용감함과 능력, 그리고 그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결심은 그를 불멸의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는 그의 삶의 어려움과 그의 능력과 용감함을 기리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그 능력과 용감함은 그를 중국 역사의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악비의 이야기는 그의 용감함과 능력, 그리고 그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결심을 기리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그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그의 능력과 용감함은 그를 중국 역사의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그의 용함과 능력을 기리는 이야기로 전해져 왔고, 그는 그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 용감한 전사로 기억됩니다 전설적인 전사 악비는 그의 독특하고 뛰어난 전략적 사고력에 눈부신 용감함을 더해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내는 능력을 보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국에 걸쳐 멀리멀리 퍼져나가며, 그의 대단한 업적이 널리 알려져,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에 충분한 존재였습니다. 그의 군대는 그의 뛰어난 리더십 아래에서 항상 승리를 가져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의 이름은 일반적인 백성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부신 성공은 부러워하는 사람들을 만들었고, 그들은 그를 배신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는 간신들의 모함에 불시에 부딪혔고, 그의 생명을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싸웠습니다. 그의 눈먼 용기와 흔들림 없는 결단력은 그를 더욱 강하게 했습니다. 그의 나이가 30대라는 젊은 시절에 그는 남송의 중요한 지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그의 기술과 전략은 그를 불멸의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능력은 송나라의 과학 기술 발달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특히 차륜선과 같은 고급 기술이 그의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을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시내는 그를 모함하고 죽이려 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시내는 송나라의 재상이었으며, 그는 악비와는 완전히 다른 주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을 피하고 화해를 주장하는 '주어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비는 그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능력과 용감함은 그를 중국 역사의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악비의 이야기는 그의 뛰어난 능력과 용감함, 그리고 그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결심을 기리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그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그의 능력과 용감함은 그를 중국 역사의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그의 용함과 능력을 기리는 이야기로 전해져 왔고, 그는 그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 용감한 전사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그의 급격한 성공과 성장은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을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시내는 그를 모함하고 죽이려 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시내는 송나라의 재상이었으며, 그는 악비와는 완전히 다른 주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을 피하고 화해를 주장하는 '주어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비는 그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능력과 용감함은 그를 중국 역사의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그의 용감함과 능력을 기리는 이야기로 전해져 왔고, 그는 그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 용감한 전사로 기억됩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용감함과 능력, 그리고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결심을 기리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악비의 전략적 사고와 눈부신 용감함은 우리 모두에게 큰 영감을 주고,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용감함과 결단력, 그리고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결심을 기리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용감함과 결단력, 그리고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결심을 기리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악비는 송나라를 위해 싸우는 데 자신의 삶을 바쳤지만, 그의 노력은 결국 그를 배신하는 사람들에게서 불이익을 입게 되었습니다. 1140년에 악비는 패서를 지원하다가 불의의 섬무사로 직위가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금나라와의 전쟁을 계속 주장하며 송나라를 보호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 무거운 대가를 치르게 만들었습니다. 시내와 같은 주점파들은 그를 방해하는 요소로 여겨 그를 배제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악비에게 누명을 씌워 그를 옥에 가두었고, 1142년 1월 27일에는 그를 처형하였습니다. 악비는 죽기 전에 "나의 결백한 마음은 하늘에 태양처럼 밝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죽음 후, 시내는 악비의 죽음에 대한 최상의 설명을 묻는 주점파의 충에게 "아마 있을지도 모르지"라는 궁색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악비의 누명이 벗겨지고 그의 명예가 회복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1204년에는 송나라의 고종이 악비의 성과를 재평가하였고, 그를 아방으로 추봉하였습니다. 악비의 무덤은 '아방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그의 동상은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악비를 배신한 사람들은 그의 동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시내와 그의 부인 왕씨, 그리고 악비를 배신한 간신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동상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분노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동상에 침을 뱉었고, 이로 인해 중국 정부는 그곳에 공안을 배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공안들은 오히려 사람들의 분노를 더욱 부추겼습니다. 결국, 악비의 명예는 그의 죽음 후에야 제대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악비는 그의 생전에 뛰어난 무장이었으며, 그의 공적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는 중국의 한족 왕조에서 오랫동안 영웅으로 존경받았지만, 1980년대 이후로는 다민족 국가 개념을 주장하는 중국 정부에 의해 구국의 영웅이라는 타이틀을 빼앗겼습니다. 반대로, 전통적인 간신의 상징이었던 시내는 민족 융합의 선구자로 재평가 되었습니다. 악비의 이야기는 그의 뛰어난 능력과 용감함, SM용품그리고 그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결심을 기리는 이야기로 전해져 왔습니다. 그의 공적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인정받고 있으며, 그는 그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 용감한 전사로 기억됩니다. 그의 이야기는 그의 용감함과 능력을 기리는 이야기로 전해져 왔고, 그는 그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 용감한 전사로 기억됩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용감함과 결단력, 그리고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결심을 기리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육식동물이 공룡처럼 크지 못하는 이유

동물탐구학 (2023-11-27 오후 10:50:31)

이 동물들은 육식동물이고, 저 동물들은 초식동물입니다. 이 두 동물을 비교해 보면, 초식 동물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초식동물들은 매우 힘이 세고 커서, 매서운 맹수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다른 동물들을 제압하고 사냥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육식동물이 몸집이 더 커야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육식동물이 아니라 초식동물의 몸집이 더 커질 수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초식동물은 육식동물의 먹이가 되기 때문에, 초식동물이 약하고 온순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다른 동물을 사냥해야 하는 육식동물을 강하고, 잔인하고 근육질의 맹수일 것이라고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바뀌어야 합니다. 초식동물은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육식동물보다 훨씬 강한 종도 있습니다. 하마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하마는 단순히 물가에 사는 온순한 동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거칠고 잔인하며, 몸무게는 1200kg에 이릅니다. 하마는 60km/h로 달릴 수 있고 어금니는 최대 60cm까지 자라기도 합니다. 가죽은 매우 두꺼워서 사자의 이빨로도 쉽게 뚫을 수가 없습니다. 하마는 가장 강한 치악력을 가진 동물 중 하나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하마의 치악력은 1000kg로, 사람의 두개골을 사탕처럼 씹어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상에서 가장 큰 동물인 코끼리에게는 대적할 동물이 없습니다. 길이는 8m, 키는 4m, 몸무게는 8톤까지 나가며, 하루에 140kg의 식물을 먹어 치웁니다. 코끼리는 이처럼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 어떤 동물도 함부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초식동물은 이토록 무시무시한 몸집을 가지게 됐을까요? 커다란 초식동물과 커다란 육식동물을 비교하면, 초식동물이 크기에서 압도적으로 월등합니다. "돕습니다. 그리고 그런 데엔 이유가 있습니다. 육식동물은, 생각과는 다르게 사냥만큼이나 자주 죽은 시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사바나의 마사이 사자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사자는 꼬리 포함, 185cm의 길이까지 자라며 몸무게는 200kg까지 나갑니다. 최고 시속 80km까지 달릴 수 있고 그 속도를 10초 동안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먹잇감들도 그만큼 빨리 달립니다. 가젤은 97km/h, 얼룩말은 64km/h, 기린은 60km/h까지 달립니다. 어떤 초식 동물들은 사자보다 느려 보이지만 이들은 최대 속도에 빠르게 도달하고, 저항도 거셉니다. 그래서 사자는 주로 밤에, 먹잇감에게 15m까지 접근해서 기습하는 방법으로 사냥을 합니다. 그래서 주에 한 번 또는 두 번 사냥에 성공할 뿐이며, 사냥 성공률은 고작 30%에서 50% 사이입니다. 그래서 죽은 시체가 있다면 기꺼이 기회를 잡습니다. 사냥을 하는 경우에도 사실 약하고 어린 개체를 주로 노립니다. 그들의 몸집이 커지면, 더 많이 사냥하고 더 많이 먹어야합니다. 한편, 작은 동물들을 사냥하기에는 몸이 매우 둔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마, 기린 같은 큰 동물들을 사냥해야 합니다. 좀 더 큰 동물들을 사냥할 때 에너지를 최대 2배 더 많이 사용합니다. 게다가 사냥 성공률을 줄어드는 데 비해, 사냥할 때의 위험은 더욱 커집니다.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도 에너지 소비가 늘어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고려했을 때, 1000kg가 넘는 육식 동물은 살아남기 힘들다고 합니다. 실제로 가장 큰 지상 육식동물인 북극곰은, 최대 1100kg까지만 자랍니다. 같은 이유로, 육식 공룡들은 초식 공룡들만큼 거대하게 자라진 못했습니다. 초식동물들에겐 큰 몸집이 도움이 됩니다. 몸집이 클 수록 사냥당할 확률이 줄기 때문입니다. 초식 동물들은 단지 돌아다니며 도망치지 않는 풀들을 먹이로 삼습니다. 그래서 코끼리 같은 초식동물들은 육식동물처럼 재빠르고 민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몸집을 키울 순 없었습니다. 한 번의 사냥으로 약 3일을 버틸 수 있는 육식동물과는 다르게 초식 동물들은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먹이를 찾아야 했습니다. "효과적이지는 않습니다. 물론 매일 매일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력의 영향이 적은 해상 동물들은 예외적으로 더더욱 크게 자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몸집이 크면 물 속에서 체온을 유지하기에도 유리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왕고래는 모든 동물을 통틀어 가장 큰 육식동물입니다. 대왕고래는 동물성 플랑크톤을 먹이로 하기 때문에 몸집이 커도 괜찮습니다. 매우 많은 수의 동물성 플랑크톤이 한 곳에 모이기도 하고, 잘 도망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대왕고래는 초식 동물처럼 많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식동물은 풀만 먹고 어떻게 근육질이 될 수 있었을까요? 초식동물처럼 채식이 우리를 살찌게 할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온순하고 약한 채식동물의 이미지는 식물이 고기보다 지방, 단백질 같은 영양소가 적다는 사실 때문에 생긴 오해이기도 합니다. 초식동물은 어마어마한 양의 풀을 먹음으로써 이를 극복했습니다. 4개의 위를 가진 동물들이 있습니다. 반추 동물이라 불리는 소, 양, 사슴, 기린은 4개의 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동물들은 식물에게서 최대한으로 영양소를 뽑아낼 수 있습니다. 소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소는 움직이는 발효 탱크와 같습니다. 소가 얻는 대부분의 영양분은, 소가 먹는 식물이 아니라 소의 위에 있는 미생물들로부터 옵니다. 소는 풀을 섭취하는게 아니라, 풀을 미생물의 먹이로 주는 것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위에서 미생물들이 풀을 분해하고 발효해서,설탕, 아미노산, 지방산, 비타민과 같은 영양분들을 배출합니다. 당은 미생물의 먹이로 쓰이고, 세 번째 위에서는 나머지 부산물들이 흡수됩니다. 네 번째 위는 수조 마리의 미생물들의 무덤입니다. 죽은 미생물들이 네 번째 위에서 소화액에 녹아, 아미노산, 즉 단백질이 되어 흡수됩니다. 또한 미생물이 부산물로 내놓은 다른 영양분도 흡수됩니다. 미생물은 40%60%의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고, 소의 위에는 1000조 마리의 미생물들이 있습니다. 미생물들의 무게는 1020kg이며 소는 미생물들에게서 충분한 양의 단백질을 얻습니다. 코끼리, 토끼 같은 위가 한 개 있는 동물은, 대장이나, 맹장에서 비슷한 과정을 거치지만 반추동물만큼 효과적이지는 않습니다토끼는 영양분을 맹장에 공 형태로 저장하여 항문으로 배출하는데, 그 공 형태의 배설물에 남아있는 영양을 충분히 흡수하기 위해 다시 먹습니다. 이 배설물엔 1그램 당 1억마리의 미생물들이 있어 단백질이 매우 풍부합니다. 코끼리는 매우 큰 하나의 위를 가지고 있지만 먹은 음식의 40%밖에 소화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코끼리는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양의 식물을 먹어야만 합니다. 어떤 동물들은 단백질이 풍부한 곡물이나, 열매에 의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방은 어떻게 얻을까요? 식물의 세포벽은 셀룰로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식이 섬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매우 억세기 때문에 사람의 위에서는 잘 소화되지 않습니다. 이 식이섬유는 주로 탄수화물이며, 초식 동물의 소화 과정에서 미생물이 포도당, 그리고 지방으로 바꿉니다. 우리는 채식이 우릴 살찌게 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위는 초식동물과 같은 효율적인 소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위에는 몇 조 마리의 미생물도 없으니까요.

존재하는 것은 우주 의식 뿐이다

우주잉여분 (2023-11-03 오전 1:07:18)

디팩 초프라의 저서 "당신은 우주입니다"는 우리의 현실과 의식에 대한 깊은 탐구를 제공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과학이 현재까지 해결하지 못한 중요한 문제들, 특히 의식이 어디에서 생성되는지에 대한 문제를 다룹니다. 의식이 생물학적 결과물이며 주로 뇌에서 생성된다는 가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주요 가설입니다. 이는 사람이 머리를 부딪히면 의식을 잃거나, 마취를 받거나, 사망하면 의식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적으로 관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디팩 초프라는 이런 사실들이 의식의 경험을 잃는 것이지, 의식 자체의 근원이 뇌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지는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생물학자들은 뇌가 의식을 생성하는 방식을 쓸개에서 담즙이 나오거나 위에서 염산이 생성되는 것과 비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의식이 무엇인지, 즉 모든 경험이 일어나는 장소라는 복잡한 개념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생각을 하고, 감각을 느끼고, 형상을 보는 등의 경험을 하지만, 뇌를 관찰해도 그 안에서는 전류와 화학물질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의식이 어떻게 생성되는지, 그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우주가 어떻게 발현되었는지 모르는 것과 비슷한 문제로, 아직 과학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현대 과학의 중요한 도전이며, 이를 통해 우리의 의식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디팩 초프라는 우리가 우주가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발현되었는지, 또한 의식의 기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의식이 형체가 없는, 물질적인 형태를 갖지 않는 추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그의 주장은 우리가 현재까지 알고 있는 과학의 한계를 인식하며, 우리가 아직 의식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양자역학은 현재 과학의 기술과 지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학문은 미시세계의 세계를 설명하며,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근간을 이루는 법칙들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양자역학 내부에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며,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코펜하겐 해석입니다. 이 해석은 우주를 관찰하는 존재가 없다면 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합니다. 이는 즉, 우리의 의식에 의해 우리의 현실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생명체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경험하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현재의 물리학자들 대부분은 무신론자이며 현실주의자로, 그들은 의식을 제외하고 현실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양자물리학은 계산과 예측의 방법을 제공해주지만, 그 이론은 현상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디팩 초프라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가 전체의 0.01%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이론을 발견하고 탐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최근에 제시된 이론 중 하나는 바로 우주가 의식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론은 무작위적인 사건들과 우주의 자연법칙, 그리고 지구상의 생명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물리학자 프리먼 타이슨 교수는 그의 인생에서 풀리지 않은 세 가지 수수께끼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이 우주는 생명과 정신을 위해 미세하게 조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현대 과학의 도전이며, 이를 통해 우리의 의식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이론과 지식을 탐구해 나가야 합니다. 디팩 초프라는 우주가 미세하게 조정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만약 우주가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이렇게 대화를 나누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둘째로, 원자의 운동은 예측할 수 없는 무작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번째로, 인간의 의식은 아직도 미해결의 수수께끼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수수께끼들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디팩 초프라는 이들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리학과 수학이 우리가 겪는 경험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하므로, 우리는 생각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식을 쌓고, 우리의 의식 속에서 경험을 하게 해 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개념입니다. 이런 개념들은 호기심, 기쁨, 형체, 냄새 등과 같은 우리의 경험을 상징하며, 우리는 이 경험들을 마치 물체처럼 취급하고 이름을 붙여서 식별합니다. 이런 개념들은 우리의 의식에서 만들어지며, 우리가 경험을 겪는 방법과 지식 탐구의 방법을 위해 특정 단어들을 연결해 놓았습니다. 경험은 의식이 그 스스로를 이런 경험이라고 인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실존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의식이 겪는 경험에 단어를 붙인 것일까요? 디팩 초프라는 우주, 몸, 정신이라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의식이 우리가 퀄리아라고 부르는 다양한 경험을 겪을 수 있도록 스스로 변형하고 조절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모든 것은 지각적이며 정신적인 것이며, 우리는 이 다양한 경험에 이름을 붙여 인간계라는 우주를 만듭니다. 인간의 지식은 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우리의 지식의 한계는 우리가 내다보는 물질의 한계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것들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적외선, 자외선, 초음파, 초음속 등을 경험할 수 있는 기기들을 발전시키고 있지만, 현실은 무한합니다. 이런 기기나 기준들이 현실의 경험을 우리의 내면으로 가져오는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주의 의식의 대리인으로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탕으로 현실을 창조해 나가고 있습니다. 현실이란 의식 자체를 알고 있는 것, 또는 알아내려는 노력 그 자체입니다. 의식은 시간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이라는 개념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겪는 경험이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몸이 실제한다고 말합니다. 눈을 감고 스스로의 몸을 느껴보면, 약간의 에너지와 약간의 진동, 감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어린 아이가 '몸'이라는 단어를 모른다면, 그 아이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을까요? 바로 감각입니다. 이 감각은 의식에서 옵니다. 감각은 의식의 변형된 형태이며, 의식이 스스로를 변형해서 감각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형체, 색채, 형상 등의 활약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몸은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감각의 흐름이며, 그것은 감각에 대한 인식입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감각과 인식은 어렸을 때와 완전히 다른 경험입니다. 의식의 활동이 그 스스로를 변형시켜서 경험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실 물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물질이라고 보는 모든 것은 활동입니다. 그리고 몇 가지 활동들은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어 가기 때문에 그것이 똑같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더 큰 렌즈로 바라볼 때, 우리는 아무것도 정지해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활동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활동은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지각의 특성입니다. 우리가 겪는 경험은 시간 속에 존재하지만, 경험을 스스로 변형시켜 드러내는 그것은 시간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각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교류하며 이 현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체가 영원불멸의 존재이며, 시간을 초월한 존재이며, 죽음마저 착각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물은 형체를 드러내고 사라집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것은 나타나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파동을 일으키는 것은 의식입니다. 우리들이 이 우주 자체로서 파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없다면, 우리 몸에서 경험하는 경험들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없다면 생각이라는 경험도 없고, 감정에 대한 경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각자 개개인이지만 동시에 무한한 존재입니다. 무한 존재가 개인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고, 그 이유는 우리들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국소적 경험을 하는 무한한 존재이며, 인간적인 경험을 하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우주는 의식과 같으며, 사실 의식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경험을 하든 간에 그것은 의식을 통해 알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우주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개념입니다. 인간의 개념은 교육을 통해 나옵니다. 하지만 교육은 우리가 아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까지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저 정보만 전달해줄 뿐입니다. 모든 경험은 핵심 의식 또는 순수 지각의 변형된 모습입니다. 지각은 무한 가능성의 장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우주 안의 모든 물질이 사라진다면 대부분 사람은 우주 공간 밖에 남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만약 물질이 사라진다면 우주 역시, 시간도 사라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주'라고 하는 것은 아직 현현되지 않은 우주 의식이며,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은 표현된 우주 의식입니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가 바로 시공간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마음, 우주 등은 인간이 만든 개념으로, 영원한 현재 속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의식과 형체와 현상을 경험하게 하고, 지식을 쌓게 하는 수단입니다. 현재는 시간이 아닙니다. 현재는 영원을 들여다 보는 창입니다. 시간을 초월하며 개념들이 존재하지 않는 자리에서, 영원하고 시간을 초월한 지각이 시공간을 돌고 다시 돌며 형태와 현상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주, 유전자, 정신, 입자 등, 우리가 이름을 붙이고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인간이 설정하는 개념입니다. 이 개념들은 의식을 알고 경험하는 방법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변형된 형태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우주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우주 의식뿐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이 개념들을 넘은 정체성 그리고 객관적인 존재입니다. 주체와 객체로 무엇을 나누는 것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인가요? 사실, 이 모든 것은 하나입니다. 모든 인간의 고통은 개념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생기는 결과물입니다. 죽음은 경험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이 경험이 탄생하고 죽는 지금 현재라는 시간을 초월한 순간 속에 존재하는 우주의 의식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경험의 일부일 뿐, 그것은 우주 의식의 변화의 일부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시간을 초월하며, 우리는 이 순간을 경험하고, 변화하고,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변화하고 그 변화를 인식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즉, 죽음은 우리의 의식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